오늘은 내가 과기대를 졸업한지 10년이 되는 기념일이다. 1997년 7월 2일, 유스트 제1기 본과생 졸업식이 학교 운동장에 열렸었다. 그날은 날씨가 무지 더워 검정색 까운을 입고 졸업식을 마치고 나니 온몸이 푹 젖었고, 일부 동문들은 피부가 볕에 타서 껍질이 일어나는 일까지 생겼었다.
10년이란 무정세월 속에서도 감회가 깊은 것은 이어지는 과기대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 사랑 속에서 우리 유스트인이라면 누구나 다 힘을 얻고 또 따뜻함을 느낄 것이다.
여기 2005년을 마감하고 2006년을 맞으며, 박명운 동문의 요청에 따라 과기대의 사랑을 추억으로 쓴 글이 있다. 한글자도 고침이 없이 올리며, 나와 아내(채해숙, 93급 전자전산학과), 그리고 두 아이(이 혜양(8살), 이 혜동(3살))들의 과기대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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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과기대
사랑은 달콤하다. 현재 진행형인 사랑의 뜨거운 열기를 말하지 않더라도, 추억으로 간직된 사랑은 더욱 그 아릿한 달콤함으로 사랑이란 말 한마디만으로도 늘 마음 한구석을 잔잔히 설레이게 만든다.
과기대에 대한 내 사랑이 바로 이러한 사랑이 아닌가 싶다. 과기대는 단지 나에게 학문과 지식과 인생을 가르친 모교뿐 아니라, 내 사랑의 뿌리를 묻고온 마음의 본향이 되었다.
나의 젊음을 불살랐던 연길의 북산벌 그 언덕, 지난날의 사랑과 환희와 기쁨과 애틋함을 찾아 허구한 날 꿈속에서 찾아가 보는 그 곳이다.
먼 후날 나의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과기대가 나에게 준 첫 인상은 결코 아름다움이나 사랑 등 화려한 단어들과 별로 상관이 없었다.
나에게 있어서 대학입학이란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였다. 하지를 완전히 쓰지 못하는 엄중한 장애인으로서, 고중을 졸업하며 훌륭한 대학시험 성적을 취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체의 장애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대학의 문들은 나를 향해 굳건히 닫겨져 있었다. 91년 고중을 졸업하고 93년에 과기대에 입학하기까지 대학 꿈을 이루기 위하여 2년동안 전전긍긍 하며, 과기대가 설립되어 최초의 본과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중학교의 선생으로 계셨던 아버님으로부터 듣고, 내가 다니던 중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동원되어 연명으로 사인을 하여 대학에 가기를 소원하는 나의 간절한 마음을 담은 편지와 함께 김진경 총장님께 전해졌고, 총장님이 “우리 대학은 바로 이런 학생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라”는 한마디와 함께 나의 대학입학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매에도 그리던 대학을 향하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였다. 기쁨과 설레임과 그리고 약간 두려움까지 섞여 있었다.
연길역에 도착하여 동행다하던 이덕권(93급 전자전산) 등 학생들과 기차에 내려 마중나온 차량을 타고 학교로 향했다. 번화한 시내거리를 벗어나 차는 점점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올리막길을 한참 달려 마침내 하얀 층집(본관동)이 댕그렇게 세워진 높은 언덕에서 차는 멈춰섰고, 차문이 열리면서 “저녁식사 하세요.”하는 부드러운 목소리(길미정 영양사님)가 들려왔다. 저녁 식사 시간이어 우선 식당으로 차를 댄 것이었다. 그 때의 식당은 그 후로 잠시 목공실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완전히 모습을 감춘 본관동 옆의 임시 건축물이었다.
식사를 하는 과정의 두 가지 인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순수한 한식도 우리 조선족 음식처럼 맛이 괜찮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교수님들도 학생들과 같은 식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또 총장님께서 마저도 식기를 들고 학생들과 함께 줄을 서서 식사 순서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기숙사로 향했다. 그 당시 우리를 기숙사로 안내하던 한기복 사감님의 “너들 키(열쇠) 가졌어?” 한마디에 우리는 어리둥절 해져버렸다. 갑자기 귀에 서먹한 한국어 환경에 뛰어든데다 영어까지 섞이니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사건이 왜 이토록 나의 기억속에 뚜렷히 자리잡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충격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본관동과 학사동이 위치한 언덕에서 기숙사로 향하는 길도 엉망이었다. 흙길 그 자체였고 여기저기 공사를 하다 남겨진 건축재료들이 널려 있었다. 숙사에 들어서니 바닥을 가느라 기계들이 귀청을 찢어낼듯 아츠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나마 신입생들을 위하여 준비한 2층의 어느 한칸에 들어 짐을 풀었다.
그 날 저녁은 학생들이 전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점호는 하지 않았고 한기복 사감님이 이미 기숙사에 입주한 학생들을 모아놓고 간단한 연설을 하였다. 연설의 내용은 기억에 남지 않지만 그 때 한기복 사감님이 책상이었든지 혹 무슨 물건을 장져놓은 위에 올라서서 이야기 하였고, 학생들은 질서없이 에워싸고 서서 한사감님을 올려다 보며 연설을 들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영화에서 보았던 중국 혁명시기 학생운동의 선동 장면같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상이 깊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지만 정신은 점점 말똥해졌다. 새로운 환경이었고 온통 어리둥절한 일과 장면들만 있고… 과기대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기숙사는 공사 마무리 단계라 상하수도는 물론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었다. 세수하고 이를 닦는 물은 기숙사 밖에 설치해 놓은 물탱크를 사용하여야 하였고, 화장실 역시 기숙사 밖에 임시로 만들어진 간이 화장실을 사용하여야 했다. 하여 아침마다 세수대야를 든 학생들이 줄을 지어 물탱크를 향하고, 간이 화장실 밖에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가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학생들이 육속 도착하였고 오리언테이션이 시작되었다. 총장님이 하셨던 개교식사가 인상적이었다.
“……
학생 여러분!
이 자리에 여러 분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나가실 여기 계신 교수님들이야 말로, 구미 여러 나라의 우수한 대학에서 자신의 정력과 시간과 돈을 들여 획득한 학위를 가지고 개인의 안락한 경제생활과 명예를 포기한 채, 여러 분들과 더불어 여러 분의 학문의 진보와 발전에 자신의 인생의 보람을 찾고자 하는 사랑주의자들의 대표적인 표본입니다.
이제 여러 분은 이 대학에서 인생의 목적이 개인의 이기적 영달에 있지 않고, 국가와 민족과 인류를 위한 봉사와 헌신에 궁극적인 인생의 보람을 추구할만한 위대한 삶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연변과학기술대학은 여러 분들에게 평화와 번영의 길을 참구하고 모색해 나갈 배움의 보금자리가 될 것이며, 또한 세계를 향한 여러 분들의 꿈과 이상을 키우고 실천해 나갈 도약대가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대학은 새로운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인류 전체가 서로 사랑하며 협력하고 화해하는 참된 평화와 화해의 길을 가르쳐 21세기 세계를 지도해 나갈 진정한 중화의 책임을 다 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여러 분은 이 학교에서 진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개개인에게 부여된 무한한 창의력을 개발하고 함양하여 경쟁을 통한 호상 간의 협력이 개인과 인민을 위한 진정한 평화와 안전을 담보해 나가는 최상의 길인 것임을 배우고 익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힘을 합하여 21세기 세계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21세기 역사 기록자가 되겠다는 높은 이상과 큰 꿈을 품고 과학기술대학에 입학한 여러 학생들에게 영광되고 축복된 대학생활이 되기를 축원하면서 개교식사를 맺습니다.”
사랑으로 차넘친 교수님들이 우리와 함께 하게 될 것이고, 전 인류를 위한 위대한 꿈과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라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이에 대한 바른 이해는 없었고, 지금도 음미할 수록 느낌이 새롭다.
그러는 가운데 일주일 간의 오리언테이션을 마치고 정식 수업에 들어갔지만, 어려움은 아직 여러 가지가 남아 있었다.
우선은 점심식사 문제였다. 위에서 말씀드린 간이식당의 자리수가 모자라 점심식사 시간이면 학생들은 곽밥을 먹었는데, 점심식사 때가 되면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본관동, 학사동 앞에 즐느런히 서서 곽밥을 기다리다가 곽밥이 도착하면 하나씩 타들고 두 명, 세 명씩 학교 앞에 모여 식사를 하였는데, 마치 공사장에서 근로자들이 식사를 하는 장면을 방불케 하였다. 그런데 그 때의 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하나의 어려움은 겨울에 접어 들었는데 스팀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숙사에 전기스팀이 하나씩 차례져 기숙사 난방은 그런대로 문제가 없었지만, 가장 큰 애로사항은 샤워를 하는 것이었다. 엄동설한에 찬물에 샤워를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학생들은 극기훈련을 하는 용사들마냥 찬물에 뛰어들어 샤워를 하곤 하였는데, 그 때 저녁마다 샤워실에서 찬물에 뛰어들며 지르는 고함소리가 또한 일경이었다. 그 후 샤워문제는 총장님이 층마다 대용량 전기 온수기를 배려하여 주셔서 얼마 후 한단락 고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교수님들의 사랑이 모든 것을 녹여 주었다. 행동강령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더욱 열심이었다. 지금은 학생들이 많아 거의 불가능 하겠지만, 93급만 있던 1년 동안은 기숙사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몇 십명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주말마다 교수님과 사모님들께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와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과 나누곤 하였다. 이는 이역타향에서 학문을 추구하는 학생들의 고향과 부모님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 주었고, 가족과 같은 끈끈한 뉴대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튜터제도를 도입하여 교수님들이 학생들을 몇 명씩 돌보면서 늘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거의 외국계 교수님들이셨기 때문에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다만 학문뿐이 아니었다. 지금에 비해 그 때까지만 해도 상대적으로 폐쇄된 사회였기 때문에 교수님과 사모님들의 여러 가지 이 세상에 대한 견문들과 지식들은 그 후 학생들의 성장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 우리의 마음은 많이 굳어져 있었던 것 같다. 외국인 꾸린 사립대학이라는 것 때문에 일부 경계심내지는 적대심까지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허나 교수님과 사모님들은 그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셨고 몸소 행동으로 이런 마음을 녹여 주셨다. 서로 만나면 인사하는데 습관되어 있지 않던 우리에게 길에서 보면 꼭 먼저 허리를 굽히며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였고, 친절한 대화와 행동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쳤다. 지금도 아침 운동시간이면 한손에 비닐주머니를 들고 다른 한손에 흰 장갑을 끼고 교정을 거닐며 담배꽁초와 쓰레기를 주어 모으던 총장 사모님의 모습을 눈에 선히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에는 희한한 것이 아니지만, 처음 겨울방학에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총장님께서 부모님들께 드리는 선물이라며 한국으로부터 쵸코파이를 가져다 나누어 주던 따뜻한 추억도 있다.
그리고 행동이 불편한 나를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전기절약을 위하여 평소에는 엘리베이터 운행을 제한하면서도 나에게 엘리베이터 열쇠를 하나 주면서 방편을 도모해 주었고, 또 새로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슬로프를 만들기 위하여 본관동과 기숙사 입구의 구조를 뜯어 고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사랑으로 방종하게 만든건 절대 아니였다. 윗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고 1기생들의 전통이 학교의 학풍을 만들어 간다면서 모든 면에서 엄격한 요구를 하였다.
우선 옷차림에서부터 그랬다. 중학교 때 하던 것처럼 생각하여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교수님 수업에 들어갔다가 숙사에 쫓겨 들어가 다시 옷차림을 하고 오던 일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저녁 점호 벨이 울리면 기숙사의 청소를 마치고 기숙사의 네 명 학생이 뒷짐을 지고 문옆에 서서 검사를 받았으며, 아침 운동 시간에 제대로 기상을 하지 못하거나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여 벌로 오리걸음에 엎드려 뻗치기로 늘 근육이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공부에 대한 요구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당시 저넉 자습 장소로 사용하던 학교 식당에는 저녁마다 학생들로 꽉 차 있었고, 낼을 패우며 공부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전산과의 경우에는 입학하여부터 3학년부터 일어생이든 영어생이든 모두 영어로 전공과목을 이수하여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특히 일어생들은 기초 전공과목 외에도 하루에 네 시간에 넘는 영어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전공과목 숙제와 영어 공부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12시까지 공부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되었고, 지어 하루 저녁에 영어 단어를 몇 백개씩 외우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3학년부터는 어김없이 영어로 전공과목 강의를 진행하였고, 지금에 와서는 그 것이 개인적인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과기대에 입학했던 첫 학기에 있었던 두 가지 일만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첫째 사건은 간염 바이러스 휴대자들에 대한 처리결과이다. 나도 입학 후 신체검사에서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로 확정되었고, 그 당시(지금까지도) 다른 학교의 경우라면 이런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어 병을 치료하도록 휴학을 시킨다. 그 때 나는 앞이 캄캄해 짐을 느꼈다. 어떻게 이루어진 대학 꿈인데 또 이렇게 중도반단 하여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런 학생들에 대한 처리문제를 놓고 학교에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잘 통일되지 않았다. 그 때 총장님께서 “이런 학생들을 집에 돌려 보내서는 안된다. 내 자식같은 학생들은 어떻게 그냥 집에 돌려 보내고 말것인가? 학교에 남겨서 계속 공부를 시키면서 병을 치료시키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그리하여 그 후에는 자기의 식기를 따로 들고 다니며 식사를 하고 따로 소독을 진행하던 “특수한” 학생들이 있었으며, 후에는 학교 의무실에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하고 약도 발급하고 하였다. 자기의 학생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과기대의 원칙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사건은 부정으로 입학한 학생들을 퇴학시킨 일이다.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국가 정식입학 과정을 밟지 않고 각 중학교를 다니며 학생들을 모집하였는데, 그러다 나니 일부 학생들이 허위 성적증명을 이용하여 입학을 한 것이다. 그 후 각 성 초생반공실을 통하여 진실한 성적이 확인되면서 십몇명의 학생들이 퇴학처분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기왕 정식 초생이 아닌 이상 적당히 처리하면 그런 학생들을 남기여 계속 공부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정직성에 대한 문제에서만은 절대 타협할 수 없다는 학교의 태도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그 중의 많은 학생들이 이듬해 재수를 통하여 다시 과기대를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퇴학당했던 학교를 재수를 통하여 다시 선택하는 것은 또한 과연 어떠한 미련때문일까?
그리고 우리 1기생들은 사명감으로 어깨가 무겁기도 하였다. 참조할만한 선배들의 경험이 없기에 모든 것을 백지같은 상황에서 새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인상깊은 것은 1기 학생회가 첫번째로 되는 학교 축제를 진행하던 기억이다. 축제라는 것은 그 당시의 우리를 놓고 말하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였다. 전 중국의 대학을 둘러 보아도 참조할만한 내용이 별로 없었다. 모든 것을 처음으로부터 만들어 가야 했다. 제1기 학생회 박철(93급 전자전산) 회장을 중심으로 학생회 임원진 모두가 전력으로 투입되었다.
내가 그 때 맡았던 것은 전반 축제의 고조를 이루게 될 우등불만회였다. 우등불만회라는 것을 TV나 영화를 통하여 드문 보았던 것이 전부의 지식이었다. 문의할 수 있었던 모든 교수님들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고, 우등불을 피우는 장작의 선택으로부터 쌓는 방법, 우등불만회의 프로그램 진행방식, 내용, 주의사항 등을 하나하나 익혀갔고, 대학시절로 놓고 말하면 완전히 생소한 시장을 돌며 장작을 사고, 우등불 밑에 파묻을 고구마와 감자를 가마니채 사오던 기억이 새롭다. 전반적인 축제의 호황과 더불어 우등불만회가 성황리에 진행되었고, 학교 운동장의 둔덕에 앉아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을 에워싸고 횐희로 피어나는 얼굴을 조용히 보면서 나의 마음도 끝없는 감격으로 차고 넘쳤다.
꼬박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보지 못하고 축제를 진행한 학생회 임원진은 마감한 날 저녁, 축하연도 뒤로 미루고 우선 기숙사에 들어와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축제의 성공적인 마감과 함께 몰려오는 피곤때문에 며칠동안 계속 진행된 축제의 여파에 계속적인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다른 학생들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그렇게 혼곤히 잠들고만 것이다.
……
북산벌에는 바람이 많다. 눈보라도 많다. 그 때는 학교 정문앞까지 버스도 통하지 않았다. 첫번째 겨울 방학을 하던 날, 그날은 눈도 많이 내렸고 바람도 몹시 불어 얼마나 춥던지. 학교에서 민가가 있고 택시가 보이는 곳까지 내려오는데 나는 휠체어를 타다나니 거의 눈속에서 구을다 싶이 하였다.
지금은 학교에 연결루가 잘 만들어져 학교의 “만리장성”이라 불리기도 하고, 또 학생들은 아무리 춥고 바람이 부는 날이라도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이 실내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허나 지금 생각하면 눈보라가 몹시 불 때도 기숙사에서 학사동까지 그 거세찬 눈바람을 맞받아 수업을 위하여 굳게 걸어가던 모습들이 대견스럽다. 어떠한 고난도 다 뚫고 오늘의 과기대를 만들어 온 모든 과기대인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우리는 4년이라는 대학시절을 마치며 졸업을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서 또 총장님의 졸업식사를 인용해 본다.
“……
사랑하는 졸업생 여러 분,
여러 분은 우리들의 자랑이며,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여러 분들이 이 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여러 분을 한 가족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이 북산가 언덕에 여러 분과 함께 한 추억들은 여러 분에게나 저에게나 앞으로 길이 간직될 것입니다. 여러 분이 처음 이 학교에 들어올 때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히나 학교의 초창기부터 오늘 날이 있기까지 어려움을 함께 한 여러 분들에게 저는 누구보다 뜨거운 사랑의 정을 느낍니다. 이제 여러 분은 당당한 중국공민으로서 사회에 진출하게 됩니다. 저는 그 동안 여러 분이 보여준 노력과 인내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또한 오늘 날의 여러 분이 있기까지 여러 분들을 아껴 주고 성원해 준 부모님과 여러 가족들의 헌신적인 희생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 학창시절을 마감하는 자리인 동시에 새롭게 여러 분의 가족은 물론 조국과 민족, 인류의 역사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지는 헌신의 날임을 명기하십시오. 지금 세계는 20세기를 마감하면서 대서양 중심의 서양 문명세계로부터 태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문명세계를 열어 가는 21세기의 문턱에 있습니다. 이제 여러 분의 조국인 중화인민공화국은 과거의 정지와 폐쇄의 잠에서 깨어나 세계의 중심에서 새로운 인류 공동체 형성을 위하여 중화의 위대성을 발휘하는 새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21세기가 생존을 위한 투쟁과 혁명의 시기였다면 새로운 시대는 전 인류의 공존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며 진정한 지구촌 공동체를 실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교정에서 터득한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열정과 인류 공존 공영의 길을 담보하는 평화,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사랑의 정신을 과감하게 실천함으로써 여러 분의 조국이 세계, 인류 역사 위에 정신적, 도덕적으로 진정한 주도국가로 세워져 나가는 데 여러 분이 주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 분들이 내 디는 발자취는 앞으로 여러 분 후배들이 뒤따라 가야 할 길입니다. 여러 분이 자랑스러운 연변과기대의 전통을 세워야 하는 엄숙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교정을 나서는 여러 분, 마지막으로 제가 여러 분들에게 약속하고 싶은 것은 이 대학은 평생 교육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여러 분이 나아가서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여러 분의 모교는 어머니 품과 같이 여러 분의 배후에서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 분의 늠름한 모습을 바라보니 우리의 땀과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여러 분에게 영광된 앞날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
우리가 졸업하던 때부터도 많은 세월이 흘러 인젠 과기대의 졸업생들이 중국 전역 내지는 세계에 널려 있게 되었다. 더욱 자랑스러운 것은 우리 과기대 졸업생들이 총장님이 바라시던대로 자기의 자리에서 과기대의 영광을 빛내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이다.
그리고 또한 중국에서 둘도 없는 졸업생들의 끈끈한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는 또 우리가 둘도 없는 자호감을 갖고 계속해서 엮어가야 할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마다 햇살은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
과기대의 졸업생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노래일 것이다. 나는 이 노래를 듣고 부를 때마나 바람부는 과기대의 언덕에서 굳게 걸어가던 우리들의 모습을 떠 올린다. 바로 그 과기대의 언덕에 우리의 사랑이 있고, 또 우리는 그 사랑을 갖고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불타는 그 가슴으로 이 세상을 밝혀갈 것이다. 그 것이 바로 세상을 놀래울 과기대의 힘인 것이다.
……
오늘도 북산벌 언덕에는 눈보라가 휘몰아 칠 것이다
오늘도 북산벌 언덕에는 낭낭한 글소리와 밤을 패우는 불빛이 있을 것이다
오늗도 북산벌 언덕에는 세계를 향한 꿈이 나래칠 것이다
……
이 밤도 도시의 콘크리트 장벽들 사이로 마냥 부드러운 빛으로 어둠을 꿰뚫는 저 조각달에 내 사랑 과기대에 대한 그리움을 부쳐 보낸다.
--2005년을 마감하고 새해를 바라보며
2005년 12월 29일 새벽